세계 금융시장에 국채를 둘러싼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미국과 이란의 평화 협상이 결렬되면서 인플레이션 공포가 다시 글로벌 채권 시장을 덮쳤다. 에너지 비용 상승이 물가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란 우려 탓에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 시점은 기약 없이 밀리고 있다. 핌코(PIMCO), 브랜디와인 글로벌, 나티시스 등 주요 투자 기관들은 31조 달러 규모의 미 국채 시장에서 고금리 기조가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내다보며, 인플레이션 전망이 명확해질 때까지 자산 배분에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중이다. 경제적 요인뿐만이 아니다. 각국의 정치적 셈법과 외교 갈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든든한 안전 자산으로 꼽히던 미 국채의 위상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다.
그린란드 스캔들과 유럽의 미 국채 투매
새해 들어 덴마크의 거대 연기금 중 하나인 아카데미커펜션은 보유하고 있던 약 1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전량 매각하는 결단을 내렸다. 39조 원에 달하는 자산을 굴리는 이 기관이 내세운 표면적인 이유는 미국의 재정 건전성 악화다. 막대한 부채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를 사들이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히며 빚어진 양국 간의 심각한 외교적 마찰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을 향한 짙은 반감이 실제 금융 자산 매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소셜미디어 여론도 들끓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의 얼굴을 코미디 영화 ‘덤 앤 더머’ 주인공에 합성한 조롱성 포스터가 확산하는가 하면, 덴마크 비데베크의 한 빵집은 이른바 ‘얼간이 트럼프’ 케이크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한 그린란드 주민이 트럼프의 정치 구호인 MAGA를 비틀어 ‘미국을 물러나게 하라(Make America Go Away)’고 적힌 붉은 모자를 쓴 사진은 현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럽 대형 기관의 미 국채 이탈은 이번에 갑자기 튀어나온 돌발 변수가 아니다. 앞서 2024년 스웨덴 국영 연기금 AP7 역시 미국의 급격한 부채 증가와 짙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꼬집었다. 당시 900억 달러 이상을 운용하던 AP7은 미국 재정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미 국채 비중을 단계적으로 줄이고 다른 안전 자산을 찾기 시작했다.
아시아 큰손들의 이탈과 엇갈린 행보
오랜 기간 미 국채를 가장 많이 사들이던 큰손, 중국과 일본의 포지션 변화도 국채 전쟁의 거대한 축을 담당한다. 이들은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 기조 아래 미 국채 비중을 공격적으로 덜어내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 분산과 경제 방어에 사활을 건 중국은 미 국채 보유량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작년 11월 기준 중국의 미 국채 보유액은 6826억 달러로, 2008년 9월 이후 가장 적은 규모다. 흥미로운 점은 미 국채를 던지는 중국의 자국 내 채권 시장은 반대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중국 정부가 특별채 발행 만기를 줄여 시장의 공급 부담을 덜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면서 초장기물인 30년물 국채에 매수세가 몰렸다. 그 결과 금리가 3bp 하락하며 2.28%까지 내려앉아 한 달여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본의 상황은 글로벌 시장에 훨씬 더 공격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대규모 재정 확대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일본의 장기 국채 금리가 상상하기 힘든 속도로 치솟고 있다. 엔화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미 국채를 팔아 달러를 확보하는 동시에, 일본 내 금리가 오르면서 해외로 나갔던 자금이 다시 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중이다. 실제로 일본 40년물 국채 금리는 사상 처음 연 4%를 돌파하며 투자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반면 미 국채는 비싼 환헤지 비용을 감안하면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 실질 수익률이 마이너스나 다름없다.
7조 달러 리스크와 다가오는 경기 침체의 그림자
이러한 전방위적인 미 국채 이탈과 금리 변동은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거대한 뇌관으로 부상했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7조 달러 규모의 리스크를 경고하는 기사에서, 일본 채권 가격의 폭락과 금리 급등이 단지 일본 내부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미국, 영국, 독일 등 전 세계 금리 상승을 촉발하는 강력한 불쏘시개가 되고 있다고 짚었다.
채권 시장의 투자 심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10년 만기 미국 국채를 보유할 때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덤, 이른바 ‘기간 프리미엄’은 이달 들어 0.83%까지 튀어 올랐다. 불과 2024년 말까지만 해도 0.1~0.2% 수준이었고 지난 10년 평균치가 0.1%를 밑돌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폭발적인 상승세다. 각국의 셈법이 충돌하며 빚어낸 이 치열한 국채 전쟁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글로벌 금리 상승을 부추기고 있으며, 머지않아 올 하반기 세계 경제를 깊은 침체의 늪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짙은 위기감이 시장을 짓누르고 있다.